일기

약사 번호 3744

By 2017-10-05 No Comments

날씨 | Hunter Rain Boots

 

매년 약 2천여 명이 대한민국 약사국시를 응시한다. 작년 기준으로 현재 한국의 약사 인원수는 약 3만 4천 명이다. 1기 약사 동기부터 오늘날까지 은퇴한 수를 합하면 국내에만 몇십만 명의 약사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중 1936년생 KJH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3744번째 약사다. 그녀는 삼성 간호학교 제1기생, 삼성 운전학교 제1기생 그리고 방화관리 면허 자격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허리를 부러뜨려 진주 대병원에 입원 중이다.

붕대를 교체하거나 도사 치료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간호사들은 그녀에게 구박받는다. 82세지만, 82년생보다 정신이 더 뚜렷하고 철저한 KJH는 의료진의 빈틈을 재빨리 알아챈다. 그래서 그녀는 지적하기에 입이 아프다. 재활 기계는 최소 1년간 훈련받은 전문가만이 다뤄야 하고, 환자 침대는 보통 침대보다 더 딱딱해야 하고, 두부는 급식에 포함하면 안 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오른쪽 허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뼈가 산산이 부서져 그 파편들을 인조 뼈대로 대체해야 할 판이지만,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찾는 건 진통제가 아니라 안경이다.

그 똥꼬집은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책을 X-자로 속독하는 별난 성격의 소유자다. 1966년생 SEK도 약사다. 청소는 돈이 들어도 남이 하는 게 낫고, 교회 생활은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되고, 홈쇼핑은 어쩔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SEK가 상위 2프로의 IQ를 가지고 주로 하는 일은 암 치료제 개발과 순정 만화 읽기다.

그 쓸데없는 똥꼬집. 나도 물려받았다. 하지만 외할머니나 엄마처럼 약사는 아니다.

한때는 요란한 우리 집안 여자들을 닮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요리를 못하는 외할머니와 주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엄마가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사회적인 여자가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겪는 고난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다.

검은색 머리보다 초록색 머리가 더 잘 어울리는 내가 싫었다. 그저 평범한 여자, 평범한 아내, 평범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최근까지는 그랬다.

추석을 맞아 뵈러 온 할머니는 병실의 다른 할머니들과 다를 게 없었다. 똑같이 힘도, 입맛도 없으셨다. 어떻게 살든 끝은 거기서 거긴가보다. 오히려 요란했던 할머니가 더 좋았다. 그래서 평범한 여자이기를 포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