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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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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Monitaly Pullover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카카오페이지의 캐시 뽑기 권 외 기대할 만한 게 없었다. 일상이 무료하고 허무하고 외로웠다. 티비와 야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최대한 덮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이태원 클럽과 칵테일의 맛을 알아버린 이후에는 조금 나아졌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검은색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크루’를 모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손가락에 베인 역겨운 냄새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바보처럼 감당도 못 하는 양의 술을 마셔도 나쁘지 않았다. 고맙게도 누군가가 항상 택시에 태워주고 어떻게든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 중 열 명에 아홉은 정신 못 차리는 손님을 태우기 싫어한다. 나 또한 술과 안주가 섞여 울렁거리는 속의 거북함을 호소할 때 내리라고 호통치는 기사를 여럿 만났다. 한 번은 내가 토할까 봐 놀란 기사가 비가 오는 한겨울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운 적도 있다.

지난 금요일은 근래 마신 술 중 가장 많은 양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마셨다. 간만에 친구들이 모였는데 우연히도 네 명의 생일이 비슷한 시기에 겹쳐져 축제 분위기였다. 일이 바빠서 종일 한 끼도 못 먹은 빈속에 계속 마셔댔다. 필름이 끊겨 그 날 밤의 마지막 네 시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2차가 끝나고 3차는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도착해서 누굴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집에 오는 택시는 누가 잡아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 탄 택시는 기억난다. 울렁거려서 택시 기사에게 차를 제발 좀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기사는 차를 세우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많이 울렁거리십니까 손님~? 잠시만요오~”

그러고선 대시보드 옆 칸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흔한 편의점 봉다리가 아닌 슈퍼마켓 채소 섹션에서나 볼 수 있는 투명한 봉투였다. 롤 비닐의 뜯기 선에서 명쾌한 ‘쫙’ 소리를 내며 끊어주었다. 그냥 주지도 않고 내가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끝을 돌돌 말아서까지. 준비된 기사였다. 차분한 목소리에 괜히 나도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맘 편히 속 안의 찌꺼기를 배출했다.

발밑의 봉투를 보며 정신이 점점 돌아왔다.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기가 찼다. ‘난 또 여기서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릴 때 기사님이 한결같이 “잘 들어가세요오~”하며 배웅해줬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도 인사했다.

전봇대 주변에 쌓인 쓰레기와 눈더미에 고이 묶은 봉투를 던졌다. 내 안의 찌꺼기를 버리며 다시 술에 기댈 생각도 같이 버렸다.

운수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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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 TOM DIXON Cube Stapler

 

타닥타닥.’

스템플러 소리가 정수리에서 난다. 진료실 침대 끝에 앉아 상처를 꿰맨다. 의료용 스템플심이 내 살을 집는다. 마취는 했지만 스템플심이 내 두상을 쫙 잡아당기는 느낌이 전해진다

12 50 점심시간 십 분 전에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창구에서 곧바로 진료카드를 작성한다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창구직원분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은 진료가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나 역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리며 한 마디 건넨다

이것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병원 침상 끝에 머리를 조아리고 앉았다. 간호사는 두 손으로 가르마를 가르고 상처를 소독한다. 거즈를  눌러가며 피를 닦아내신다. 머릿속을 유심히 들여다본 간호사는 의사 선생님을 부른다.  진료실 문을 여시며 벌컥 등장한 의사 선생님은 양손으로 내 두상을 부여잡고 눈인사 후 수술 준비를 지시한다

12시경 조금 이른 점심시간 영진이와 대청마루기사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켰다. 식당 앞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인도에 문 밑이 긁혔다. 식사 후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연남동에 오면 매번 방문하는 아스트로노머스로 향했다. 카페 근처에 주차하고차 문이  긁힐세라 조심하며 차에서 내린다차 문을 닫고 고개를 들으며 한 걸음 띠는 찰나 무언가를 머리에 박았다. 건물 입구에 바깥으로 향해있는 철제 구조물 모서리에 머리를 찍혔다. 고개를 숙이고 아픈 머리에 조심히 손끝을 가져다 보는데멀건 피가 묻어난다. 곧이어 영화에서나 볼법한 핏줄기가 내 이마로 흐른다영진이는 황급히 차에서 휴지를 건넸고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가까운 외과병원으로 향한다. 뚝배기가 깨졌다.

 

image @johnminlee

지하철에서 눈가리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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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Cote&Ciel LAPTOP TRAVELLER

 

금요일 오후, 강남역에서 미팅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머릿속에는 자리에 앉아 홍대까지 가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앉아 가기 위해선 신속한 포지셔닝이 중요하다. (포지셔닝 ; 곧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서 있는 것) 지하철이 도착하고, 출입문이 열린 순간부터 주위를 빠르게 살핀다. 자주 이동하는 시간대가 아니라서 누구 앞에 서야 할지 좀처럼 감이 안 온다. 그러다, 중년 여성 앞,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 옆에 포지셔닝을 해본다. 서초역에 다다랐을 때쯤, 운 좋게 바로 앞에 자리가 났고, 망설임 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숨 돌리던 찰나, 옆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내 앞에 서 있는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에게 반대편을 가리키며,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신다. 자연스레 할머니 손끝에 내 시선이 머물렀고, 젊은 여성은 반대편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 배가 부른 엄마의 모습으로순간, 나는 민망함에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괜히 혼잣말을 뱉었다.

봐가지고…().”

자리에 앉은 임산부는 할머니께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누구에게나 항상 자리를 양보하는 편은 아니지만, 주위를 잘 살펴보자는 생각은 하면서 살고 있다. 평소 좁지 않은 주변시와 오지랖으로 조그마한 양보를 실천해왔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은 딱,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봤다.

 

image @johnminlee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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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Eastlogue C-1 Jacket

 

‘내일 월요일입니다. 주무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남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게 미안하다. 하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에 앉은 할아버지의 스마트폰 폰트는 너무 커서 화면에 겨우 한두 문장만 보였다. 특정한 색을 설정하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 90프로가 매일 보는 흰색과 노란색 말풍선도 비현실적으로 큰 글자로 보니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곱씹는 듯 같은 문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셨다. ‘내일 월요일입니다. 주무세요.’ 하지만 월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이었다. 일요일에 온 문자를 며칠이 지난 뒤 다시 보고 계신 거였다.

문자 내용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자녀의 혼인 관련 문제로 각 집안 어른들이 만든 채팅방인듯했다. 할아버지가 엄지로 천천히 대화를 거슬러 올라갈 때 ‘당신 때문에’, ‘진작에’, ‘도대체’ 등 짜증과 화가 섞인 단어만 눈에 들어왔다. 한참이 지난 뒤 할아버지는 다시 채팅방 맨 밑으로 돌아가 또 뚫어져라 쳐다만 보셨다. ‘내일 월요일입니다. 주무세요.’

대화를 절단하는 끝 마디에 본인이 할 말도 못 하셨을 할아버지. 사연도 모르고 할아버지도 몰랐지만 왜인지 안아드리고 싶었다.

괌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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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Aesop Marrakech Perfume

 

과장님은 봉천역부터 교대역에서 하차할 때까지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네, 네. 네. 네. 아, 네. 그래야죠, 네. 알겠습니다. 네.” 실제로 직함이 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장처럼 보였다. 두꺼운 밤색 안경 뿔테 뒤의 눈은 심히 처져 있었다. 거의 바닥을 보고 통화하다가 어느 역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치켜들었을 땐 생각보다 주름이 없어서 놀랐다. 그는 평범한 회색 슈트에 평범한 밤색 가죽 브리프케이스를 무릎 위에 얹히고 오전 9시에 잘 못 걸려든 전화에 열심히 통화했다.

브리프케이스의 손잡이에는 ‘괌’이라 적혀있는 기념품 열쇠고리가 달려있었다. 반짝이 플라스틱 고리에 열쇠는 없었다. 아주 촌스러웠다.

“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은 용기내어 통화를 마무리했다.

과연 그가 괌에 두고 온 기억은 얼마나 즐거웠길래 거기에 달아둔 걸까. 그가 그렇게라도 붙드는 추억은 어떤 행복일까.

photography @worship_p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