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택시 기사의 기억

By 2018-03-12 No Comments

날씨 | Monitaly Pullover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카카오페이지의 캐시 뽑기 권 외 기대할 만한 게 없었다. 일상이 무료하고 허무하고 외로웠다. 티비와 야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최대한 덮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이태원 클럽과 칵테일의 맛을 알아버린 이후에는 조금 나아졌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검은색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크루’를 모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손가락에 베인 역겨운 냄새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바보처럼 감당도 못 하는 양의 술을 마셔도 나쁘지 않았다. 고맙게도 누군가가 항상 택시에 태워주고 어떻게든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 중 열 명에 아홉은 정신 못 차리는 손님을 태우기 싫어한다. 나 또한 술과 안주가 섞여 울렁거리는 속의 거북함을 호소할 때 내리라고 호통치는 기사를 여럿 만났다. 한 번은 내가 토할까 봐 놀란 기사가 비가 오는 한겨울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운 적도 있다.

지난 금요일은 근래 마신 술 중 가장 많은 양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마셨다. 간만에 친구들이 모였는데 우연히도 네 명의 생일이 비슷한 시기에 겹쳐져 축제 분위기였다. 일이 바빠서 종일 한 끼도 못 먹은 빈속에 계속 마셔댔다. 필름이 끊겨 그 날 밤의 마지막 네 시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2차가 끝나고 3차는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도착해서 누굴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집에 오는 택시는 누가 잡아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 탄 택시는 기억난다. 울렁거려서 택시 기사에게 차를 제발 좀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기사는 차를 세우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많이 울렁거리십니까 손님~? 잠시만요오~”

그러고선 대시보드 옆 칸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흔한 편의점 봉다리가 아닌 슈퍼마켓 채소 섹션에서나 볼 수 있는 투명한 봉투였다. 롤 비닐의 뜯기 선에서 명쾌한 ‘쫙’ 소리를 내며 끊어주었다. 그냥 주지도 않고 내가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끝을 돌돌 말아서까지. 준비된 기사였다. 차분한 목소리에 괜히 나도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맘 편히 속 안의 찌꺼기를 배출했다.

발밑의 봉투를 보며 정신이 점점 돌아왔다.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기가 찼다. ‘난 또 여기서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릴 때 기사님이 한결같이 “잘 들어가세요오~”하며 배웅해줬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도 인사했다.

전봇대 주변에 쌓인 쓰레기와 눈더미에 고이 묶은 봉투를 던졌다. 내 안의 찌꺼기를 버리며 다시 술에 기댈 생각도 같이 버렸다.